1917. 12. 30. | 만주 간도성 화룡현 명동촌에서 아버지 윤영석과 어머니 김용의 맏아들로 출생. 아명 해환(海煥). |
1925. 4. 4. | 명동 소학교에 입학. 같은 학년에 고종사촌 송몽규, 당숙 윤영선, 외사촌 김정우, 문익환 등이 있었다. |
1927. | 명동소학교 5학년 때에 급우들과 함께 『새 명동』이라는 등사 잡지를 만든다. |
1931. 3. 15. | 명동소학교 졸업. 학교에서 졸업생 14명에게 김동환 시집 『국경의 밤』을 선물한다. 명동소학교 졸업 후 송몽규, 김정우와 함께 명동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중국인 소학교 화룡 헌립 제일소학교 고등과에 편입하여 1년간 수학한다. |
1932. 4. | 용정의 기독교 학교인 은진중학교에 송몽규, 문익환과 함께 입학. 명동에서 20리 정도 떨어진 이 곳으로 통학하는 윤동주를 위해 가족 모두가 용정으로 이사한다. |
1934. 12. 24. | 『초한대』, 『삶과 죽음』, 『내일은없다』등 3편의 시를 쓴다. 이는 오늘날 찾아 볼 수 있는 윤동주의 최초 작품이며, 이 때부터 자기 시 작품에 시작(詩作)날짜를 기록하고 있다. |
1935. 9. 1. | 은진중학교 4학년 1학기를 마치고 평양 숭실중학교 3학년 2학기로 편입. |
1935. 10. | 숭실학교YMCA문예부에서 내던 『숭실활천』제15호에 『공상』이 실려 그의 시가 처음으로 활자화. |
1936. 3. | 숭실학교에 대한 신사참배 강요에 항의하여 자퇴하고 고향 용정으로 돌아와 5년제인 광명학원 중학부 5학년에 편입한다. |
1936. 11.-12. | 간도 연길에서 발행되던『카톨릭 소년』에 동시「병아리(11월호)」와「빗자루(12월호)」를 윤동주(尹東柱)란 이름으로 발표한다. |
1937. | 『카톨릭 소년』에 동시「오줌싸개지도(1월호)」, 「무얼먹고 사나(3월호)」를 윤동주(尹東柱)란 이름으로, 「거짓부리(10월호)」를 윤동주(尹童舟)란 이름으로 각기 발표. 동주(童舟)라는 필명은 이 때 처음 사용한다. |
1937. 8. | 100부 한정판으로 발행된『백석 시집 : 사슴』을 구할 길이 없자 필사하여 소장한다. |
1937. 9. | 진로 문제로 문학을 희망하는 윤동주와 의학을 선택하라는 아버지 윤영석이 갈등하나, 할아버지 윤하연의 권유로 아버지가 양보하여 문학에 진학하기로 한다. 『영랑시집』을 정독하다. |
1938. 2. 17. | 광명중학교 5학년 졸업. |
1938. 4. 9. | 서울 연희전문학교 문과 입학, 3년간의 기숙사 생활 시작. 같은 해 송몽규도 윤동주와 함께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한다. 외솔 최현배 선생에게 조선어를 배우고 이양하 교수에게서 영시를 배운다. |
1939. | 조선일보 학생란에 산문「달을 쏘다(1.23)」, 시「유언(2.6)」, 「아우의 印象畵(10. 17)」를 윤동주(尹東柱)와 윤주(尹柱)라는 이름으로 발표. |
1939. 3. | 동시「산울림」을 『소년』3월호에 윤동주(尹東柱)란 이름으로 발표. 새로 연희전문에 입학한 하동 학생 정병욱(1922-1982)을 알게 되어 친해진다. 정병욱과 함께 이화여전 구내 형성교회에 다니며 영어 성서반에 참석한다. 이 무렵 릴케, 발레리, 지드 같은 작가들의 작품을 탐독하며, 프랑스어를 자습한다. |
1941. 5. | 정병욱과 함께 기숙사에서 나와 종로구 누상동 9번지의 소설가 김송의 집에서 하숙하기 시작. 김송과는 하숙생이 되면서 우연히 알게 된다. |
1941. 6. 5. | 연희전문학교 문과에서 발행하는 『문우(文友)』지에 「우물속의 自畵像」, 「새로운 길」을 발표. |
1941. 9. | 요시찰인 김송과 학생들에 대한 일본 경찰의 주목이 심하여 그곳을 나와 북아현동의 전문적인 하숙집으로 들어간다. 서정주의『화사집』을 즐겨 읽는다. |
1941. 12. 27. | 전시 학제 단축으로 3개월 앞당겨 연희전문학교 4학년 졸업. 졸업 기념으로 19편의 작품을 모아 자선시집(自選詩集)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를 77부 한정판으로 출간하려 했으나 당시 흉흉한 세상을 걱정한 주변인들의 만류로 뜻을 이루지 못한다. 시집을 3부 작성하여 한 부는 자신이 가지고, 이양하 선생과 정병욱에게 1부씩 증정한다. 본래 이 자선시집의 제목은 『병원』이었으나「서시(序詩)」를 쓴 후 바꾸었다. "병원"은 병든 사회를 치유한다는 상징적인 의미였다. 윤동주의 도일 수속을 위해 성씨를 "히라누마"라고 창씨개명한다. |
1942. 1. 24. | 고국에서 쓴 마지막 작품이 된 시 「참회록」을 쓴다. |
1942. 4. 2. | 도쿄 릿쿄(立敎)대학 문학부 영문과 선과에 입학. 송몽규는 교토 제국대학 서양사학과에 입학한다. |
1942. 4.-6. | 「쉽게 씌어진 詩」등 이 때 쓴 시 5편을 서울의 친구에게 보낸다. 오늘날 볼 수 있는 윤동주의 마지막 작품이다. 여름방학에 마지막으로 고향에 다녀간다. 동생들에게 "우리말 인쇄물이 앞으로 사라질 것이니 무엇이나 악보까지라도 사서 모으라"고 당부한다. |
1942. 10. 1. | 교토 도시샤(同志社)대학 영문학과 선과에 편입. |
1943. 7. 10. | 송몽규가 교토 시모가모 경찰서에 독립운동 협의로 검거된다. |
1943. 7. 14. | 고향에 가려고 준비하던 윤동주도 송몽규와 같은 혐의로 검거되고 많은 책과 작품, 일기가 압수된다. 당숙 윤영춘이 교토로 윤동주를 면회하러 가서 윤동주가 일본 형사와 대좌하여 우리말 작품과 일기를 일어로 번역하고 있는 것을 목격한다. |
1944. 3. 31. | 교토 지방재판소에서 <독립운동> 죄목으로 2년형을 언도 받는다. |
1944. 4. 13. | 송몽규 역시 같은 죄목으로 2년형 언도 받고 윤동주와 송몽규는 이후 큐슈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된다. |
1945. 2. 16. | 큐슈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사망. |
1945. 3. 6. | 유해는 화장하여 고향으로 모셔와 3월 6일 용정의 동산 교회 묘지에 묻힌다. 장례식에선『문우』지에 발표되었던「우물속의 自畵像」과 「새로운 길」이 낭독되었다. |
1945. 3. 10. | 송몽규도 큐슈 후쿠오카 감옥에서 옥사. |
1945. 5. | 단오 무협 윤동주 묘소에 가족들이 "시인윤동주지묘"라는 비석을 세우다. |
1945. 8. 15. | 일제 패망. |
1946. 6. | 동생 윤일주가 서울로 오다. |
1947. 2. 13. | 경향신문에 정지용의 소개글과 함께 윤동주의「쉽게 씌어진 詩」가 해방 후 최초로 발표. |
1947. 2. 16. | 정지용, 장내원, 안병욱, 이양하, 윤영춘, 정병욱, 유영, 김태균, 윤일주 등 30여 명이 모여 서울 소공동<플라워 회관>에서 윤동주와 송몽규의 추도회를 가지다. |
1948. 1. | 유고 31편을 모아 정지용의 서문을 붙여『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를 정음사에서 간행. 작품 선별과 편집은 동생 윤일주가 담당했다. |
1948. 12. | 누이동생 윤혜원이 윤동주의 중학 시절 원고를 가지고 고향에서 서울로 이주한다. |
1953. 7. 15. | 정병욱이『연희춘추』에 「고 윤동주 형의 추억」을 기고. |
1953. 9. | 윤동주에 대한 최초의 본격적인 비평「윤동주의 정신적 소묘」가 소석규에 의해 쓰여진다. (시와 평론집『초극』에 수록). |
1955. 2. | 윤동주 10주기를 기념하여 89편의 시와 4편의 산문을 엮어『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를 정음사에서
다시 펴내다. 이때 초판본에 실렸던 정지용의 서문과 강처중의 발문은 제외된다. 편집은 정병욱의 자문을 받아 윤일주가 하고 표지화를 김환기가 담당했다. |
1955. 2. 16 | 연희대학교 문과대학 주최로 최현배, 박영준, 김용호, 정병욱 등 친지, 동문, 후학들이 모여
10주기 추도회를 열다. 저녁에는 당숙 윤영규의 집에 강소천, 이한직, 최영해, 노천명, 조병화 등 문단, 친지 20여 명이 모여 윤동주 추모의 밤을 가진다. |
1967. 2. | 백철, 박두진, 문익환, 장덕순의 글을 책 말미에 추가 수록하고 판형을 바꾸어 새로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를 정음사에서 간행. |
1968. 11. 2. | 연세대학교 학생회, 문단, 친지 등이 모금한 성금으로 연희전문 시절 윤동주가 기거하던 기숙사 앞에
<윤동주 시비> 건립. 제막식에는 고인의 은사인 최현배, 백낙준 등과 문단 중진, 친지, 학생 등 수백여 명이 참석한다. 시비는 윤일주가 설계하고 윤동주의「서시」친필을 확대하여 새겼다. 비명의 초고는 유영 교수가 담당하고, 글씨는 고인의 연세대 후배인 박준근이 썼다. |
1970. 10. 15 | 10월 15일부터 1주일간 윤동주 25주기를 기념하여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윤동주 친필 유고와 유품전>을 개최한다. |
1976. 6. | 외솔회 발행『나라사랑』 제23집을 윤동주 특집호로 엮다. |
1976. 7. | 그 동안 게재 유보하였던 시 작품 23편을 시집『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에 추가 수록한다. |
1988. 8. | 불어판 시집 Le ciel, le vent, les etoilles et la poesie출간. 임병선 역, Seoul Computer Press펴냄. |
1989. 11. | 영어판 시집 Heaven, the Wind, Stars and Poems 출판. Daune Vorhees, Mark Mueller, 김재령 공역, 삼성 출판사 펴냄. |
1996. 12. | 한글, 중국어판 번역시집『尹東柱遺詩集』간행. 최문식, 김동훈 편. 중국 연변대학 출판사 펴냄. |
1997. 11. | 불어판 번역시집 Ciel, vent, etoille, et poems 간행. 김현주, Mesini 역. |
1999. 2. | 사진판『윤동주 자필 시고 전집』간행. 왕신영, 심원섭, 오오무라 마스오, 윤인석 엮음, 민음사 펴냄. |
2000. 5. | 연세대학교 핀슨홀 내에 <윤동주기념실> 개실 |
2001. 5. | <연세대학교 윤동주기념사업회> 발족. 이후 매년<윤동주 시문학상>, <윤동주 기념 백일장> 등 개최. |
2012. 7. | <종로구 윤동주 문학관> 개관 (서울 종로구청, 청운동 수도 가압장). |
2012. 9. | 중국어 번역시집『仰望天空毫无愧恨』 간행. 번역 里?, 중국 북경출판사/연변인민출판사 펴냄. |
2012. 9. | 중국 명동촌 생가 주변을 <윤동주 문학공원> 으로 조성 (중국 용정시). |
2013. 2. 27. | 윤동주 시인의 유족들이 친필 유고와 유품, 관련 수집자료를 연세대학교에 기증. <윤동주기념관> 현판식. <윤동주 시인 기념코너> 제막식. |